형님에게
- 작성일
- 2001.03.26 19:35
- 등록자
- 김정숙
- 조회수
- 778
어느새 길가엔 노랗게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남녘에서 불어온 달디단 바람은 코끝을 스치고 계절은 이제 어엿한 봄인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3월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군요.
3월이 지나면 4월.
그 4월엔 식목일이며 청명이자 한식인 5일이 있습니다.
지난겨울에 돌아가신 시어머님 산소에 잔디 옷을 입혀드려야 되는 날이기도 하지요.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지만 그새 시간은 흘러 계절은 벌써 봄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아! 어머님!
그 어머님으로 인해서 생판 남남인 저와 형님이 동서라는 인연을 맺었고 그 어머님의 며느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형님과 맺어진 동서라는 인연의 시간도 어언 열 다섯 해가 넘었군요.
어느새 이렇게 되었다 생각하니 흐르는 세월이 마치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과 같이 흘러갔다고도 생각되는 지난 시간들.
그 지난 시간들 속에서 언제인가부터 저는 형님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시어머니께서 크게 다치시고부터일 것입니다.
바람처럼 아들네 집을 다니시던 그 정정하셨던 시어머니께서 꼼짝도 못하시며 누워 계시던 모습을 뵈었을 때, 그 놀라운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더욱 더 놀라웠고 죄송스러웠던 것은 그 수발을 일일이 하시며 싫은 내색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형님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다 휴일이라도 되어 조금이나마 형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려 내려갈라치면 형님은 막차 타고 가지 말고 넉넉하게 올라가라며 제 등을 밀어내기가 일쑤였지요.
그러며 "일하며 살림하기도 힘든데 너무 자주오지 마레이. 이거는 어차피 내 일 아이가!" 라는 얘기도 하셨지요.
일하러 다닌다는 핑계(?)로 더 자주 찾아 뵙지 못했던 제 마음은 형님의 그 얘기에 더 죄송할 수밖에, 그리고 그랬기에 올라오는 버스 속에서는 '더 자주 찾아뵈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 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마음들은 부산과 포항의 거리만큼이나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했던 순간과 시간들이었지요.
이것이 지난해 7월까지의 일입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시어머님의 병세도 많이 좋아 지셨고 8월중에는 아주버님의 차로 어머님이 저희 집에 다녀가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지시던 어머님이 불의 일로 다리를 한쪽 절단해야만 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그 며칠후의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생명은 건지셨지만 남편과 저의 걱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지요.
직접 모시지도 못하는 저희의 마음이 그랬는데 그 당시 형님의 마음은 모르긴 몰라도 저희보단 훨씬 더했을 터이지요?
정말 꼼짝도 못하시는 어머님의 수발을 들어 드려야 되는 것은 그 며칠간의 병원생활에서 정말 쉽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 저였는데, 그렇지만 형님은 역시 별 내색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며칠 일하러 못간 것을 걱정해 주셨지요.
그렇게 좋아지시듯 하시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지난해 11월.
모든 이들의 슬픔을 뒤로하고 그렇게 어머님은 가셨습니다.
수고하고 애쓴 형님의 보람도 없이 말입니다.
저의 마음이 지금까지도 이러한데 직접 모시며 수고를 아끼지 않은 형님의 마음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
형님!
제가 형님의 그 나이를 열배 백배 먹어도 형님의 그 마음은 닮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형님의 그 수고를 조금이라도 더 덜어 드렸어야 되었는데, 지금도 저는 형님에게 못내 죄송한 마음만 가지고 있답니다.
형님을 닮고자 하는 형님의 아래동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