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여고시절 은사님을 찾아 뵈었어요.
- 작성일
- 2001.05.24 14:17
- 등록자
- 이경옥
- 조회수
- 803
" 26년 전 여고시절 은사님을 뵈었습니다."
천지가 온통 푸르른 5월입니다. 꽃이 피었던 나뭇가지마다 돋아나 닮은듯 서로 다른 초록 잎들이 싱그런 햇살에 반짝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이 세상엔 꽃이 아니어도 아름답고 이쁜 것이 참 많구나 싶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맺어진 소중한 인연 또한 가정의 달을 더욱 가치있게 하는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이 좋은 계절에 제게도 참 의미 있는 만남 하나가 있었습니다. 26년 전의 여고시절 은사님과 극적인 해후를 한 것이지요.
지난 4월 어느날 저녁, 우연히 인터넷을 하다가 모교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고시절의 아련한 추억에 젖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스승찾기’라는 코너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호기심에 그길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도내 교사들의 인사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기서 옛 은사님은 물론, 교사가 된 친구들의 근황도 알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만나 뵙든지 전화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아는 선생님들의 연락처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그리도 찾고 싶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은 많은 스승님들 중에서도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되어 있는 그 선생님은 하필 제가 사는 포항의 과학고교에 재직 중이셨기에,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며칠 뒤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서 계시다는 과학고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시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인도 할 겸, 우선은 전화로나마 안부를 여쭙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 선생님, 혹시 K여고에 계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
" 예, 그렇습니다만..."
" 저의 은사님 같아서 확인을 하려는데요, 이름을 기억하실는지... 이경옥이라고 합니다."
" 아, 이경옥! 네가 어쩐 일이고? 야, 정말 반갑다!" 선생님의 말투가 갑자기 반말로 바뀌면서, 저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놓쳐버릴 뻔했습니다. 26년 전의 제자를 선생님이 기억하고 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은 못난 제자의 이름은 물론 그때의 제 모습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 .....곧 찾아 뵙겠습니다. 같은 포항에서 이렇게 모르고 살았다니요."
전화를 끊고 저는 은사님이 계신 학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기서 지금은 교감이 되신 선생님의 직무 모습을 사진으로 미리 뵐 수 있었습니다. 사진이라 그런지 안경을 쓰신 것 외에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의 연세는 얼마나 되셨을까? 아마도 주름이 많이 생겨 나셨겠지? 머리는 많이 희어 졌을꺼야." 가슴속에 빛 바랜 추억으로 자리잡은 26년 전 여고시절을 되살리며, 하루라도 빨리 선생님을 뵈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 졌습니다.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두고, 드디어 선생님을 뵈러 가는 마음은 설레임과 흥분으로 벅찼습니다. 백화점에 들러 고르고 고른 넥타이가 은사님께 어울리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이젠 아줌마 티가 줄줄 흐르는 제자를 정말로 한 눈에 알아 보실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나 은사님께서는 늘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시느라고 세월조차 걸러오셨는지, 생각보다 훨씬 젊고 건강하셨습니다. 잔주름이 생긴 것 외에는 머리도 별로 희어지지 않았더군요. 은사님께는 우리 모교가 첫 부임지였고 그 해 처음으로 우리 반 담임을 맡으셨다네요. 학교 근처에 사시면서 등하교 길에 더러 마주치기도 했던 사모님과 서너 살배기 꼬마와 등에 업힌 아기 땜에 적어도 서른 살은 훌쩍 넘었을 거라고 생각되던 그때 선생님은 겨우 스물 아홉 살이셨구요.
"선생님, 기억하세요? 저 그때 면단위 작은 마을에서 시내에 유학 온 소위 촌뜨기였잖아요. 선생님께서는 자취 살림하는 저에게 부모님 떠나 어려움이 없느냐고 자상하게 걱정도 해 주시고, 농삿일로 어렵게 학비를 보내시는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라고 장학금이나 다름없는 수업료와 보충 수업비 면제도 해주셨는데요. 저는 하필이면 선생님 담당과목인 수학 성적이 가장 부진해서 늘 죄스러웠어요. 늦었지만, 이렇게나마 선생님을 뵙게 되어 참 행복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젊고 건강하셔서 고맙기도 하구요. 선생님 덕분에 저 이렇게 바르게 성장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제 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대답 대신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고, "내가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찾아주니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하셨습니다.
그 옛날, 말괄량이 소녀가 어느덧 불혹의 문지방을 훌쩍 넘어 히끗 히끗한 머리칼과 눈가 잔주름을 안은 채로 은사님을 뵙고 보니, 이제는 사제가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