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진 빚을 다 갚을때까지.......
- 작성일
- 2001.09.17 13:45
- 등록자
- 정정숙
- 조회수
- 720
두 분 안녕하세요?
며칠전 제 아들이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져 입술에 훈장을 달게 되었습니다. 여섯바늘을 꿰맸는데 녀석은 입술이 찢어져 아팠던것보다 얼굴을 가린 그 공포에 병실이 떠나갈듯한 울음을 쏟아내더군요. 그날밤 마취가 풀림과 동시에 끙끙대며 몸을 뒤척이는 아들의 입에서 갸날프게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엄마~'. 녀석은 잠자는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엄마를 불렀습니다. "그래, 엄마 옆에 있다. 착하지, 코하고 자자." 아들을 토닥거리며 재우던 저 또한 나직이 누군가를 불렀습니다, '엄마~'. 늘 그렇지만 아들이 아플때면 어김없이 친정엄마가 생각납니다. 제가 이렇게 아팠을 때도 엄마는 아픈 제 옆에서 밤잠을 설치시며 전전긍긍 하셨겠지요.
저는 결혼하기전만해도 참 못된 철부지 막내딸이었어요. 엄마가 주시는 사랑이 당연한 듯 무뚝뚝하게 받아들였구요. 저희집 가정형편이 그랬기도 했지만, 저 역시 결혼할 때 언니들처럼 직장생활을 해서 저축한 돈으로 결혼 준비를했습니다. 결혼 날짜를 잡고 제 마음은 구름위를 둥둥 떠나니는 듯 가벼웠습니다. 무엇보다 초라한 기와집을 더 이상 들락거리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마음이 홀가분 했고, 제가 번 돈으로 결혼준비를 한다는 것에 우쭐해하며 엄마의 의견은 아랑곳 없었습니다. 새 보금자리에 맞춰 그동안 눈으로만 즐기던 장롱도 큰 것으로, 가전제품도 큰 것으로, 엄마가 귀뜸해 주시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그저 '엄만, 구식이야. 그런 엄마가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어.'이런 버릇없는 생각이 온통 제 머릿속을 꽉 채웠죠. 무엇이든 제가 생각하기에 좋은것들로만 마련했습니다. 거기다 제가 입던 옷가지들을 엄마가 친구들 모임에 간 사이 야금야금 새 보금자리로 옮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밤 늦게 들어오신 엄마는 텅빈 옷장을 보신후 누군가에게 섭섭한 마음을 털어놓으시더군요. "보소. 당신 생전에 눈에 넣어도 안아프다던 우리 막내 좀 있으면 결혼하니더. 아버지 사랑 많이 못받은 우리막내 앞길 훤히 터주소." 그날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엄마의 나지막한 흐느낌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막내야, 벌써 옷 다 옮겼대. 내 있을 때 옮기지 와."하시는 말씀에 그게 무슨 차이가 나느냐며 매몰차게 한마디 하고는 출근을 했습니다.
결혼하는 막내딸을 위해 엄마가 해주신건 무엇이든 아쉽지 않게 잘 살라는 의미로 오색무늬의 반짇고리였습니다. 저는 또 속으로 한마디 했습니다. '역시 엄마는 어쩔수 없는 구식이야.'
그렇게 저는 결혼을 했고 첫 명절을 맞았습니다.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만들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휴우'한숨을 짓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명절이면 항상 복작복작거리는 방 구석진 곳에 앉아 친척들을 위해 음식을 썰고 계시던 제겐 너무도 초라한 존재에 불과했던 친정엄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23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층층시하 매운 시집살이에, 무뚝뚝하고 대쪽같은 성격의 아버지, 코흘리개 막내 삼촌과 우리 사남매까지.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한숨 한번 내쉬지 않으셨는데, 고작 손바닥만한 전 몇가지와 생선 몇마리 부치면서 한숨이라니! 새삼 엄마라는 존재가 그처럼 위대해 보인건 처음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서 저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아내와 엄마라는 세상은 끝없는 지혜와 안내가 따른다는 것을. 그 말없는 가르침을 주신분이 바로 이 세상에 한 분뿐인 제 엄마입니다. 그런 엄마께 저는 날개를 달아줄 변변한 옷가지 하나, 수세미로 변해버린 당신 손을 반질반질하게 해 줄 화장품 하나 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쩜 저는 엄마가 평생을 통해 써보지도 못한 그래서 느껴보지 못하신 것들을 결혼과 동시에 참 많은 걸 누리고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부지였던 제가 엄마의 행복을 모조리 빼앗아 버린건 아닐런지요.
언젠가 아버지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엄마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같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세상에 그 어떤 아픔도 이겨내신 강한 엄마지만, 당신도 때론 누군가에게 기대어 한없이 위로 받고 싶으셨을 가녀린 여인이라는 것을.
항상 '엄마처럼 안 살거야'하며 엄마 가슴에 못을 박던 철부지 막내딸은 요즘 한없이 너그럽고 어진 엄마의 마음씀을 조금씩 닮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엄마, 당신은 항상 우리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잘 지내면 그것이 당신의 행복이라 하시지만, 그것이 다가 아닌것 같습니다. 엄마, 이 막내딸이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게 오래오래 사세요. 당신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