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농촌에 둔 사람들에게
- 작성일
- 2001.09.27 10:01
- 등록자
- 이경옥
- 조회수
- 769
고향을 농촌에 둔 사람들에게
저는 23년째 ‘농업기술센터’라는 곳에서, 농민들에게 농사와 생활 기술을 지도하고 있는 ‘농촌생활지도사’라는 직명을 가진 공무원입니다.
비록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 가고 있긴 하지만, 태어나서 자라고 평생직장의 일터가 된 농촌인지라, 『농촌·농업·농민』이라는 단어는 제게 남다른 의미로 와 닿습니다.
가을이 성큼 가까이로 다가온 이맘때의 농촌은 정말 풍요롭습니다.
너른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고, 과수원엔 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과일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와 단맛을 뽐내고 있습니다. 논두렁 너머 쪽빛 잔잔한 호수를 배경으로 신작로에 쭉 늘어선 색색의 코스모스, 하얗게 손을 흔드는 억새풀꽃 사이로 유유히 경운기를 몰고 가는 농부들의 모습 또한 잘 어우러진 풍경화 한 폭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촌, 도시의 뿌리이며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농촌이 실상은 소리 없이 앓고 있는 속병 환자랍니다.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무차별적으로 밀려들어오는 값 싼 외국농산물, 잦은 재해와 그에 따라 출렁거리는 시세 변동, 비합리적인 유통구조, 경제 불황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 갈수록 농업과 농민이 설자리는 좁혀져 가고, 농가 부채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창고라고 여겼던 마지막 보루인 쌀 시장마저 2004년에 완전 개방되고 나면, 과연 누가 우리의 농촌과 농업을 지킬지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농촌은 더욱 노인들만의 고달픈 삶의 현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박씨, 김씨, 아무 아무개 지지리도 못 사는 집의 아들로 며느리로 평생을 뼈가 닳도록 논밭에서 일하셨던 우리 부모님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시려고 소 팔고 논 팔아 공부시킨 우리 아들. 딸들이 대처에서 제 가정 꾸리며 잘 사는 걸 낙으로 삼으시며, 정작 당신들은 텅텅 빈 고향집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 전화조차 자주 드리지 못해도, 가장 잘 익은 첫물 고추, 햇 깨 참기름 짜놓고 자식들 다녀 갈 추석을 손꼽아 기다리신 부모님들이십니다.
밤만 되면 도져오는 신경통으로 값싼 조약을 달고 사시면서도, "늙은 우리 걱정말고 너희들이나 잘 살아라"고 오히려 당부하시며 보일러 기름 값 아낀 꼬깃꼬깃한 쌈짓돈 손주 놈 손에 어김없이 꼭 쥐어주시는 부모님이십니다.
벼 수확을 앞 둔 지금 과일 따기, 끝물 고추 따기, 참깨 수학이 한창입니다. 칠팔순의 노구에 기력이 딸리는 부모님들은, 거의 동시에 수확기를 앞 둔 각종 농작물들을 거둬들이느라고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자식들이사 이제 힘든 농삿일 하지말고 편하게 사시라고 만류하지만, 자식한테 손 벌리기 송구스럽고, 평생을 바쳐 온 농사꾼이 땅을 놀리는 건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당신들이시기에, 여전히 산비탈 묵정밭을 떠나지 못합니다.
올 추석에 고향에 가셔서, 그간 적적하셨을 부모님과 속 깊은 대화 좀 많이 나누었는지요? 아이들 학교 핑계, 차가 밀린다는 핑계로 단대목에 와서 제사상 물리자마자 떠날 채비하는 모습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주진 않았는지요? 바리바리 싸주시는 그 흔한 고춧가루, 참기름이 사실은 부모님께서 안 잡수고 아껴두신 가장 맛있는 선물이란 걸 꼬옥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들·딸·며느님들께 또 한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올해는 예년에 없이 풍년입니다. 그런데 풍년 농사가 오히려 부담스런 농촌이랍니다. 인구는 늘지만, 식생활의 서구화로 갈수록 쌀 소비가 줄어들어서 그동안 국민의 생명창고 역할을 했던 쌀이 남아도는 데다가, WTO협상에 따라 외국쌀 마저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형편이라는 것 다 아실 테지요?.
밥 짓는 일보다 빵과 우유로 아침을 해결하는 게 더 간편하고 익숙해져서, 부모님이 농사지어 보내 주신 쌀 한 포대면 1년 내내 양식이 되진 않는지요? 지난 봄 가뭄과 집중 호우로 배추 한 포기가 6천 원을 넘었을 때도, 밭뙈기에서 팔려나가는 것은 기껏 200∼400원. 아무리 잘 받아도 800원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배추값이 금값이라고 타박하진 않으셨는지요?
도시 사는 자식들 입맛에 안 들까봐 벌크건조기 대신 태양 볕에 고추를 말리느라고 근 열흘을 널고 걷기를 반복하시는 부모님의 정성을 잊은 채, 밥과 김치· 된장의 토종 입맛을 버리고, 햄버그와 피자로 자녀들을 키우시진 않으시는지요?
쌀을 사랑합시다. 쌀을 사랑하는 것은, 고향의 부모님과 농민과 농촌을 소중히 여기고 돕는 마음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