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내 주신 석류 하나
- 작성일
- 2001.11.26 23:03
- 등록자
- 서남이
- 조회수
- 708
유달리 무덥던 여름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가을도 다가고 벌써 겨울로 들어섰습니다. 당신이 가시고 혼자 남은 이 집, 지금 방안엔 올 가을에 따들인 석류 하나가 고이 놓여있습니다.
이 석류는 당신이 수년 전에 우리 아파트 화단에 손수 심은 석류나무에서 딴 것이랍니다. 그때가 우리 큰 손녀 하림이가 태어나던 해였습니다. 당신은 불편한 몸으로도 석류나무에 정성을 다하셨지요. 마침 우리 집은 1층이었기에 거동이 불편한 당신이 나무 돌보기에 더욱 쉬웠지요. 혹시라도 진딧물이 생길새라 약을 치고, 날이 가물면 주전자로 물을 길어서 나무에 쏟아 붓고는 하셨지요. 당신의 그 정성은 마치 우리 손녀를 키우듯 하였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아는지 석류나무는 가지도 쭉쭉 벋어나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무럭무럭 커나갔지요.
저는 그런 나무를 보며 이 나무처럼 당신의 건강도 하루하루 좋아지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나무는 해가 가도 도무지 열매가 맺히지 않아서 당신과 저는 안타까워하다가 결국엔 '이 나무는 아마 숫나무인가보다'하고 열매 열리기를 포기하고 말았지요. 비록 석류는 열리지 않았지만 당신은 매일 아침마다 창을 열고 석류나무부터 살폈었죠. 지난해도 봄이 되자 석류나무는 어김없이 푸른 새잎을 내었고 햇살이 도타와질수록 나무의 푸르름도 더해 갔지요. 석류나무가 푸른 그늘을 드리우던 5월 그날, 당신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순 두해, 짧은 생 중에서 20여년을 병마와 싸우다 간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당신이 애지중지하던 석류나무는 주인 잃은 슬픔도 모른 채 그저 변함없이 계절마다 제 할 도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시고 난 후 저는 당신이 그랬던 것 처럼 날마다 자고 일어나서는 맨 먼저 창을 열고는 석류나무부터 살폈지요.
올해 여름 어느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아침처럼 창을 열고 나무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데 창 쪽으로 뻗어 나온 가지에 뭔가가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겠어요. 아, 그것은 석류였습니다! 두 개도 아닌 오직 한 개가 창쪽으로 난 가지에 매달려 있었어요.수줍은듯 발그레한 얼굴을 잎사귀로 살짝 얼굴을 가리고서 말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석류가 열렸는데, 야속한 당신, 1년만 더 오래 사셨어도......
이제 가을도 가고 벌써 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올 가을, 햇살 맑은 날 곱게 익은 석류를 행여 다칠세라 조심조심 따들여서 방안 문갑 위에 고이 놓아 두었답니다. 당신의 몸은 비록 떠났지만 영혼만은 이 집에서 저와 함께 하리라고 믿기에 당신도 매일 이 석류를 함께 보면서 이 새큼한 향도 같이 맡고 계시리라 믿어요.
이제 언제까지나 슬퍼만 하지 말고 일어나 남은 삶을 새롭게 엮어가야 겠지요. 62살 쓸모없는 할머니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위해, 이웃을 위해 조그만 봉사도 하면서 말입니다.
어쩌면 방안의 저 석류 하나는 저 세상에 가신 당신께서 저를 위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닐런지요. 석류처럼 향기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주신 당신의 선물요.
저는 아이들 집에 가서 컴퓨터도 배우고 인터넸도 배워 제 메일도 만들었답니다. 당신이 계신 곳에도 메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편지가 저 쨍하도록 투명한 초겨울 하늘을 건너 꼭 당신께 닿을 것 같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내년에도 우리의 석류는 또 열리겠지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밝은 얼굴로 석류를 딸 수 있도록 더 많이 웃고 더 힘내서 살게요. 당신도 제 걱정, 아이들 걱정 하지 마시고 천국에서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당신이 보내주신 석류 하나의 향기가 가득한 방안에서 당신의 아내가 적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