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아오길 기다리며
- 작성일
- 2002.01.16 13:34
- 등록자
- 아내가
- 조회수
- 698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아들아이가 앞으로 다닐 유치원에 면접을 보고 왔습니다.
지금껏 아이를 단 한번도 학원 같은 사설기관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루종일 일하는 제 옆에서 제 일을 돕거나 혼자서 공부를 하다 동네친구들이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돌아오면 그 제서야 호빵 서너개를 들고 친구들 집으로 놀러를 갔답니다.
저는 서울에서 전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을 무렵 거래처에 작은 회사를 운영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답니다.
결혼 전에는 남편의 좋은 점만 보았는데 막상 결혼을 해 보니 남편은 전혀 딴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은 젊은 나이에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며, 때론 심한 구타를 하기도 했었고 또 타고난 방랑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를 가졌을 무렵 I.M.F를 맞아 남편의 회사는 부도가 났습니다.
이곳 저곳에 수도 없는 곳에 돈을 빌린 남편은 저몰래 친정집에까지 돈을 빌려 쓰고,또한 친정가족들에게 보증을 쓰게 하여 남편의 부도와 동시에 모두들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답니다.
책임감이 없던 남편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아이를 낳을 무렵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소문하여 남편을 찾아 보았지만, 남편을 찾을 길이 없더군요.
의지할 데 없는 서울에서 저는 모든 것이 막막하여 어떤 기관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아이를 입양할 생각까지 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천벌을 받을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모든 것이 막막했던 그 때 저는 아이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양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절차들을 밟아 아이를 입양하려고 서류를 작성하던 중 정신이 번쩍 들게끔 아들아이가 환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듯이 아이를 안고, 사무실을 나오며 생각했습니다.
"그래..난 내 아들과 함께라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제 고향 포항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았지만, 제 고향에 돌아와 바다를 바라보니 살 힘이 생겼습니다.
갓난쟁이 아들을 덜쳐 없고, 날마다 북부바닷가를 걸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웠습니다.
여름에는 푹푹찌는 더위속에서 거리에 앉아 과일장사를 했었고, 겨울에는 골목어귀에서 오뎅과 만두 호빵을 팔았습니다.
아들아이는 길거리 더위와 추위속에서 감사하게 잘 자라 주었습니다.
어떤날은 죽을 것 같이 힘이 들다가도
"엄마, 엄마" 하는 아들아이와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습니다.
덕분에 저는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 이제는 다섯평 남짓한 조그마한 가게를 얻었습니다.
작은 가게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제 옆에서 아이는 혼자서 공부를 하여 한글도 모두 깨우치고, 간혹은 정신 없는 제가 셈을 잘못하여 손님들에게 음식값을 잘못 말하면 옆에서
"아니예요? 엄마...손님 음식값은 모두 합하여 오천원이예요" 하며 금방 바른 셈을 말해주기도 하고, 제가 바빠 미처 손님들에게 물을 갖다 드리지 못하며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손님께 물을 가져다 주고, 바쁠 때는 어른 한사람 몫을 거뜬히 해내는 기특한 아이입니다.
또한 밝고 심성 또한 착하여 모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칭찬을 가득 받는 아이랍니다.
가게에 들러는 손님들은 아들아이가 보이지 않으면..
"이 집 작은 주인은 어디를 갔나요?"하며 한마디씩 아들아이를 챙긴답니다.
그런데 오늘 유치원에서 면접을 보는데 선생님께서 난데없이
"혁아! 아버지는 뭐하시니? 오늘 유치원도 구경할 겸 함께 오시지 그랬니?"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저도 아이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저는 혼자서 열심히 아버지몫을 채워가며 아이를 키웠습니다.
단 한번도 남편에 대한 이야길 한 적이 없었고, 어린 아들 아이 역시 일찍 철이 든 탓인지 제게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루는 그래도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 힘으로 아들아일 유치원에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가 앞으로 공동체 생활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아서 친구들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낄것 같은 작은 걱정이 앞섰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들을 쓰면서 다시 한번 제 마음을 다잡을 겁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 시절에도 "아무려면 내가 어린 내 아들 하나 못 거둘까?"하는 생각으로 아이를 안고 고향으로 와 오늘까지 굳건히 살았는데..
결코 오늘 같은 질문 한마디에 상처받지 않을 겁니다.
제 아들아이 역시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환하게 웃으며..
"엄마..나 배고파..빨리 가서 우리 가게로 가서 만두 먹자"라고 하더군요.
나이는 어려도 제게는 아들아이가 큰 버팀목입니다.
잠금 장치가 허술한 집에서 잠을 자도 사내아이라 그런지 어린 아들녀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