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보시고 계시죠?
- 작성일
- 2002.02.08 11:59
- 등록자
- 해들누리
- 조회수
- 687
안녕하세요.
설이 며칠 남지 않았네요.
방금 집에 전화해 보니, 엄마는 시장을 다녀왔다고 하네요.
지난 토요일날 차례에 쓸 제수 장만도 했는데, 또 뭐가 빠졌나 하고 여쭤보니 언니네 딸 (그러니까 엄마로는 외손녀가 되겠고 당신께도 외손녀가 되겠네요) 설에 입힐 한복 한벌 대신 사 달라고 했다네요..물론 돈은 주면서요. 그래도 딸이라서 설엔 한복을 꼭 입혀야 한다네요. 이제 겨우 1년 6개월된 딸아이가 그 한복을 입고 있을라 그럴까요?
올해는 쌀강정을 만들지 않을려고 했다가 그래도 설이잖아요. 당신께서 계셨다면 한달 전부터 해야 한다고 앉아 계신 자리 당신 엉덩이 덜썩덜썩 했을텐데, 그러했을것 같아서 쌀하고 집에 모아둔 콩을 곱게 갈아서 콩강정도 했답니다.
생각나세요?
한 20년전 쯤의 일 이죠.
우리집은 설 대목만 되면 설 기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빴죠.
장작을 때고 손으로 돌려야만 쌀 뻥튀기가 하얗게 부풀려나오는 흔히들 말하는 '오꼬시'-이거 일본말이라고 요즘은 잘 안 쓰는데, 어른들은 '오꼬시'라고 하면 알고, 강정내지는 튀밥이라고 하면 모르는, 하여간 천막친 가게안 바닥은 쌓인 물엿두께로 얼마나 바빴는지 짐작했을 정도고, 오뚜기 케찹통을 잘라서 한 되 들어가게 만든 쌀 통들은 길다랗게 줄을 쓰고 있었죠.
어린 우리들은 그 바쁨이 신기하기도 했고 만들어서 죽도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마냥 좋았죠. 추웠지만..
촛불을 켜 놓고 밤을 새 가면서 투명한 비닐에에 만든 강정을 넣고 봉하던 기억(불로 지진다고 하죠)...
새삼 집에 만들어 놓은 강정을 보니, 그 춥던 시절 고생했던 시절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아...~
또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처음인데, 뭐 부터 해야죠.
당신은 막내라서 평생가야 우리집에는 제사라는 것도 없었고, 명절이 되면 그냥 남들 다 하는 것 흉내 내 본답시고, 그냥 있기 뭐해서 조기 한두마리 전 한 두장 과일 한두개 사다 차려놓고 조상님께 1년내내 가족들 무사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을 올린 것이 전부 다 인데..
물론 엄마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오늘따라 더 미워지네요.
오늘은 인터넷으로 지방쓰는 법을 봤어요.
차례에 지방만 쓰면 되는지, 축문도 써야 하는지...
제사에만 축문이 들어가는지..
우리집에 딸만 있어서, 기일에도 축문은 안 쓰고 안 고해도 된다고 누가 그러는데, 집안에 남자가 없어서 그러는건지..그거는 남녀 평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잠시 흥분도 했답니다.
항상 가까운 곳에서 지켜 봐 주시는 곳에다 지난 가을 당신을 훨훨 뿌리고 돌아오고선 한번 가 봤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입춘도 되었는데, 차가 없다는 이유로 사는게 바쁘단 핑계로, 또 춥다는 핑계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하던 때 이제는 원 없이 돌아다니시겠다, 그래서 아버지 참 좋겠다 싶었는데, 그 곳이 추웠는지 따뜻했는지... 자식이라서 이렇게 무심하기 그지 없네요.
주말에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답니다.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그랬겠지요.
생전에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한 무뚝뚝한 딸, 이제서야
'아버지 정말로 사랑합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계절은 돌고 돌아도...당신을 향한 그리움은 흘러간 세월의 두께 만큼이나 두꺼운 책장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