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옛일을...
- 작성일
- 2002.06.03 09:04
- 등록자
- 김정숙
- 조회수
- 544
실내에는 라이브로 잔잔한 노래가 흐르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실로 오랜만에 마셔본 와인 한 잔에 제 얼굴은 제법 홍조를 띄었나 봅니다.
"엄마 얼굴이 대게 빨개요"라는 아들아이의 말은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말로 들렸습니다.
아들아이의 나이가 열 여섯 그러고 보니 남편이란 사람을 만난지도 어느새 만 열 일곱 해가 지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도 하게 되지만 분명 그 시절은 제게 존재하기도 했었던, 그 20대 초반에 한 남자를 만나서 제 나이 어느새 40대로 접어들었으니 흘러간 세월이 꿈이런가 합니다.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키는 제법 크고 그에 걸맞게 덩치도 제법 되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은 듯한 꺼부중한 모습 게다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깊은 눈에다 쌍꺼풀을 가진 남자.
한마디로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죠.
소개 시켜준 친구의 얼굴을 봐서 그냥 그 시간만 대충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을 그리 먹으니 별 부담이 없어지더군요.
잔잔한 음악이 흐르던 음악다실에서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한 그 만남에서 그와 나는 딱 차한 잔 마신 그 시간만큼만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권유에 의해서 우리는 무작정 걸었습니다.
초여름의 햇살이 내리쬐는 휴일 오후의 길을 그렇게 걸었습니다.
무슨 얘기들을 들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그는 주로 얘기를 하는 입장이었고 저는 그저 듣기만 하였지만 지금 제 기억으로는 햇살이 무척이나 따가웠다는 것 그리고 그의 얘기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저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얘기에만 열중해 있었습니다.
아마 친구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렇게 긴 얘기를 듣고 있지를 못했을 겁니다.
하여간 저는 묵묵히 그의 얘기를 긴 여름 해가 다 넘어 가도록 들어주었고 그렇게 그와 나의 첫 만남도 끝났습니다.
그 만남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저녁에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게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와의 첫 만남이 이미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예기치 않은 방문은 그 후에도 계속 되었고 저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었지요.
블랙 커피를 좋아한다는 그의 클래식한 취향은 가끔씩 데려가던 레스토랑에서도 그대로 나타났고 때로는 시장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는 수더분한 모습과 어울려 때로는 저를 감동시켰고 결코 말수가 많다고는 볼 수 없는 그의 진중한 모습은 급기야 제게 그 어떤 믿음까지도 주었답니다.
그렇게 그는 제 마음속에 들어와서 저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지요.
그런데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를 소개 시켜준 제 친구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그 친구는 지금 저의 손아래 시누이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남편의 저에 대한 작업(?)이 거의 끝나 제가 마음을 이미 빼앗겨 버렸을 때 남편이 제게 그러더군요.
그 때 소개 시켜준 사람이 여동생이라고 말입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속았다는 그 마음 때문에 얼마나 분하던 지요.
하지만 어쩝니까?
이미 제 마음은 빼앗겨 버린 후인데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블랙 커피를 좋아한다는 남편의 클래식한 취향 있잖아요.
이것도 순 뻥이에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결혼하여 처음엔 같이 차 한잔도 할 줄 모르던 남편이었으니까요.
이렇듯 커피는커녕 차도 제대로 마실 줄 모르면서 근사한 것은 알아 가지고 그렇게 저에게 뻥을 쳤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식집과 시장 골목의 분식 집을 찾아다니던 모습 중에서 시장을 다니던 수더분한 모습은 정말 남편의 본 모습이더군요.
하지만 양식집은, 이것도 알고 보면 순전히 뻥이었답니다.
단순히 저에 대한 작업(?) 때문에 그리하였던 것이었지요.
그것은 결혼하여서 남편이란 사람이 소위 말해서 '칼질' 하는데는 한 번도 데려가 주지를 않았다는 것에도 잘 나타났습니다.
결혼 전처럼 분위기 있는 집에서 좋은 음악도 들어가며 와인도 한 잔씩 하고 싶었지만 소원에 소원을 해도 데려가는 곳이란 지글지글 고기 굽는 곳이며 칼국수 수제비집 뿐이었습니다.
혼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뭄에 콩 나듯이 친구들이랑 간혹 어울려 가보고 아들아이가 조금 자라서는 아들아이랑 가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곳은 거의 잊다 시피하며 하며 살아온 세월 그런데 '즐거운 오후 두시' 덕분에 아주 잘 다녀왔습니다.
옛일을 추억하면서요...
남편은 식사가 끝나고 나오면서도 모든 게 어색해서 다음엔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 말하였지만 저는 정말 좋았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드립니다.
안녕히 계세요.
p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