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아이들] - 에 덧붙여 12월15일 기사 중
- 작성일
- 2009.12.17 22:35
- 등록자
- 이은영
- 조회수
- 1410
포항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1년에 걸친 학생간의 폭력사건을 취재한 15일자의 기사 내용에
보도의 시간상 짚지 못하고 넘어간 몇가지 일들에 대하여 덧붙입니다.
저는 40대의 주부이고 현재 사건이 일어난 초등학교의 학부형입니다.
이 사건은 저희 학부형들의 마음을 놀라게 했을 뿐만아니라 단순히 지역뉴스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잊혀지는 사건이 되어서는 안되기에 몇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먼저 이 폭행사건이 짧은 시간에 걸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어른들은 알고 있어야 하곘습니다.
마치 이 사건을 접할 때에 우리는 청소년 시기에 누구나 기억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속에 등장하는 엄석대란 인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휑하니 바람을 일으키면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엄석대란 학생을 오늘 우리는 우리 학교에서 다시 보게 됨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오늘 폭력사건을 행한 학생은 5학년 6학년 2년간에 걸쳐서 반 아이들 전체를 대상으로 집단 폭행을 했으며 특히나 경악할 것은 본인 스스로가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그를 두려워하는 또다른 반 아이들로 하여금 그일을 맡아서 하도록 지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조직폭력배의 보스가 그의 부하들을 시켜서 응징하는 것 처럼 그 학생이 그러한 일들을 2년간에 걸쳐서 했다는 것은 어른인 우리들을 경악하게 하고 또한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도 떨리는 손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 폭력의 정도입니다.
아이들간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단순한 다툼이나 우발적인 폭행이 아니라 초등학생이 생각해 낸 폭행이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가 잔인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 그 학생의 폭행의 실상은 상상을 하기 어렵습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면 그 반 전체의 남자아이들은 가해 학생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며 여학생들은 등을 구타당하거나 돈을 갈취당하는 일들을 겪습니다.
그 당하는 폭행의 정도란 어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일명 '햄버거'라는 이름의 폭행이 있습니다.
그날 가장 먼저 응징당할 아이를 고른 후에 그 아이를 가장 아래에 눕힙니다.
그 위에 가해학생이 지시하는 아이들이 차례 차례로 햄버거모양 눕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위에 본인이 서서는 마구 압력을 가해서 가장 아래에 깔린 아이가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을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폭력을 당한 아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에 시달리고 그 위에 얹혀진 아이들도 동일한 고통을 당할게 됩니다.
두번째는 "심폐소생술"이란 것입니다.
응징하고자 하는 아이를 여러아이를 시켜서 바닥에 누이고 그 위에 다른 아이를 올라타게 하고는
가슴을 세게 눌러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손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잔인하고도 상상이 가지 않는 이 행동은 단순한 폭력이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당한 피해학생은 집에 가서도 숨이 차고 공포에 떠는 반응을 종종 보였다고 부모님은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문을 모르는 부모님들은 자녀가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라는 의문점을 가질 뿐
그러한 폭력이 자신의 자녀에게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세번째는 청소년기를 맞는 남자아이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폭력입니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눌러서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폭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수 있을까요.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적추행을 하는 것만이 성폭력이겠습니까?
동급 학생이 그것도 같은 급우가 그런일을 행할때에 느끼는 수치감은 아마도 피해학생의 평생을
따라다니지 않을까요?
등등 그 이외에도 열거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 그 공간 !
그것은 바로 교실이였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계시는 그 공간에서도 이 일들은 행해졌다니 . . . 학부모로서는 경악할 따름입니다.
많은 수의 학생들을 일일이 보살필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느정도 감안 하더라도
이것은 교사로서의 기본적인 관찰력을 상실한 시간들이 아니였을 까요?
그 기간이 6학년에서만 1년이 넘었다고 하면 그것은 방관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시간동안 피햬자의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요?
피햬자 학생이 집에서 처음에는 "엄마..누가 오늘 때렸어.."라고 학기 초에는 말을 한두번은 했겠지요.
그러나 정상적인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대처합니까?
그럴수도 있지. 친구끼리 싸우면서 크는 거지. 너는 그것도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나이가 몇살인데
부모에게 일러주니... 내지는 .... 네가 먼저 참아. 그 아이도 우연히 그렇게 한것이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을 한 부모님.
그러한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행여라도 부모님께 말씀드린것을 알게 되면 그 가해자 학생은 그 아이를 아이들 말로 - 죽인다.-라고 표현하는 폭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이 아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집에서는 어떤 폭력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게 되고 집에서는 입을 다무는 아이가 된 채로 1년의 시간. 초등학교의 마지막 시간을 지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지자 우연히 제보를 들은 학부형중 몇분이 이일을 알게되고 아이들을 차근 차근 캐어 물으니 처음에는 그 보복이 두려워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사실을 이야기 하게되고 부모님들을 경악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이의 입에서 듣는 이야기들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폭력의 현장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내 아이가 그 폭력에 시달리고 밤에 잠도 못자고 공포에 떨떄에 부모인 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내 아이를 탓하고, 심지어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내 아이를 야단치고, 또한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반항기라고 치부했던 사실에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막막할 뿐입니다.
서로 좋은 친구의 우정을 나누어야 할 나이에 왜 이런 폭력이 학교의 교실에서 생겨야 합니까?
가해자인 그 학생은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도 , 그 부모 역시 아이들의 목메인 증언앞에서도 용서의 말을 구하지 않고 고개를 꼿꼿히 들고 앉아 있는 그 모습에서 답을 찾을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녀는 예로부터 하늘이 주신 선물이지요.
우리나라의 풍습에서건 종교가 있어서 종교를 가진 분이시던간에 일치적으로 자녀는 하늘이 우리 부모된 자에게 맡긴 책임이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이 너무 귀하여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이 사회에 나아갈 자녀들에게 한가지 두가지 씩 무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그 무기는 친구를 밟아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 그래서 내가 친구들보다 돋보이기 위해서는 힘으로라도 제압하고 , 힘으로 제압된 아이들을 밟고서 부정하게 학생 대표가 되어도 좋고, 또한 시험에서는 그 아이들을 동원해서 만점을 받는 것 까지도 실력이고 능력이라는 생각을 그 무기로 들리워서 사회로 내보내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내 아이가 든 무기로 인해서 다른 아이가 다치고 그 다친 아이가 다시 무기를 들고 다가올때에
결국은 우정이나 친구라는 존재는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에 없어집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나를 짓밟은 원수같은 녀석이 되고 또한 나를 억누르고 때리고 모욕주던 또다시 제압해야할 대상이 되고 추방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지요.
이제 우리는 내 아이에게 무어라고 해야 합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친구들이랑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단다. 설사 친구가 때리더라도 참고 맞는 것이 오히려 때리는 것보다 지혜로운 방법이란다. 네가 조금 다치더라도 절대 친구를 때려서는 안된단다."라고 가르치던 우리가 이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하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닙니까?
"일단 떄려라. 맞고 오는 것보다는 때리고 오는 것이 낫단다. 친구?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란다.
결국은 모두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야. 어떤 방법으로든 그 아이들을 이기거라. 그것이 네가 살아남은 법이다." 이제 우리는 내 자녀들을 데리고 앉아서 이렇게 말을 해야 할까요?
사회속의 문제로 우리는 유괴를 꼽습니다.
"이웃의 아는 사람도 따라가면 안된다."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부모들의 마음은 참 서글펐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이웃이 아니라 함께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또한 학교에서 씨름하며 축구하며
서로 웃음을 주고 받아야 하며 사회에서 서로를 돕는 협력자인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조차 믿음을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사회는 무엇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학교 폭력은 없어저야 한다고 누구나가 입을 모아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 벌어진 이 장기간의 폭력앞에서 누가 나서고 있습니까?
교육청과 학교 , , , 그리고 교장 교감 내지는 교사 . . .
심지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 . .
그 누구도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겨진 피햬자 아동의 마음.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인 이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친구에 대한 불신. 두려움, 공포 , 그리고 부모에 대한 잃어버린 신뢰는 어디서 세워야 합니까?
이제 보도가 나갔습니다.
보도를 해주신 김형일 기자분도 자녀가 있겠지요.
우리는 이 순간 누구를 처벌하고 또한 누구를 감싸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해자는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고 그리고 진심으로 마음으로 뉘우치고
급우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그 가해자 아동에게 있지 않다면 그 아동의 미래 역시 어른의 마음으로는 걱정스러운 것이고 , 그 가해자의 아동을 꾸짖고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부모는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어서 자신의 자녀를 지금 꾸짖고 바로 잡지 못했음을 한탄하게 될것은 누구나가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피해아동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며 쉽게 넘어가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보도가 나간 후에 이 사건이 해결되는 상황들을 후속으로 보도하여서 이일을 지헤롭게 풀어나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본으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보도의 책임이자 가장 본질적인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이 이대로 묻히길 원하지 않습니다.
가해자 피해자가 모두 회복하는 모습을 원하는 어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도해 주시고 이 사건이 또다른 후속사건들의 해결 방안이 되면 본이 되길 원합니다.
내 아이들이 먼저 당한 것은 너무도 슬프고 너무도 화가나고 너무도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이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본을 보여야 할 시간이 아닐까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학교 폭력이 우리 부모들 모르게 우리 어른들도 모르게 일어날지요.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얼마나 잘 관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아이륻의 마음을 얼마나 잘 읽고 있습니까?
이제는 피해 아동의 마음을 우리가 읽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제는 가해 아동의 마음을 우리가 읽어야 할 차례입니다.
